제목 | 기정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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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06-01-26 17: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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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그가 4세때 서당에 가서 노는데, 서당의 한 학동이 [흐를 류]자의 뜻을 묻자 선생님이 흩어져 없어지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곁에 있던 그가 물과 같이 한번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하여 서당의 선생이 크게 놀란일이 있다고 한다. 일찍부터 공부를 시작한 그는 5세때 벌써 격몽요결 효경을 읽어 대의에 통할 정도였으며 문재 또한 비범함을 보였다고 한다. 7세때 맷돌을 놓고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하늘은 돌고 땅은 고요히 있는 이치를 나는 맷돌에서 보았네.) 라 읊었으며, 또 하서 김인후 선생의 영천시에 차운을 하였는데(하늘은 창창하고 아득하여 높고 넓어 끝도 갓도 없네)라 읊은바 있으니 그의 비범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만 하다 하겠다.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당시 그가 살던 복흥방은 산간벽지인데도 여러 곳에서 그를 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대개 재동들이 재승박덕하여 경솔한 점이 있게 마련인데 그는 어린나이에도 말과 행동이 신중하여 사람들이 공경하였고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인근에 이름을 떨치고 혼자 깨우치며 학문에 몰두한 그는 그의 나이 34세인 때인 1831년 (순조31)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조정에서는 일년 뒤 그에게 강능참봉을 제수하였는데 응하지 않았다. 이때 그가 응하지 않았던 이유는 당시 문관의 전형을 맡아 보던 관청인 전조의 잘못으로 그의 선조의 이름이 잘못 기재된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후 그에게는 사옹원 주부, 전설사 별제, 평안도 도사, 무장현감 등 여러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는데 무장현감에 제수되었을 때에는 조정으로부터 세 번이나 부임하라는 독촉이 있었음에도 끝내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무장의 향리는 전례라 이르고 2개월분의 녹봉을 가져오니 그는 이를 의가 아니라며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이처럼 기회가 많았었는데도 응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여 당대의 대학자로 성장하였다. 그는 학문의 폭도 넓어서 성리학은 물론 백가의 서적과 예악 형정 병기 산수 천문지리에까지 광범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