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김상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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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06-01-26 17: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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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그는 늘 책을 가까이 하며 생활했는데 경전은 물론 백가제서에도 통하지 않은데가 없었으며 때때로 기묘사적 항의 신편을 등초한 것을 읽으며 말하기를 "비록 초야에 묻혀있는 선비일지라도 그 나라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정성이 마땅히 이같아야 한다."하였다고 하니 이로서 그의 인품의 일면을 짐작할수 있다 하겠다. 한편 당시 시국은 날로 변하여 1895년에는 민비가 왜적의 손에 시해되는가 하면 단발령이 내려지고 왜적의 마수가 날카롭게 번득이더니 드디어 1905년에는 치욕의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실질적으로 국권을 빼앗기는 이러한 조약이 체결되자 전국의 곳곳에서는 왜적의 행위에 앞장선 5적을 내쳐야하며 백성된 사람 모두가 의병이되어 이땅에서 왜적을 몰아냄으로 국권을 회복하자는 외침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1906년 2월경 면암 최익현과 돈헌 임병찬이 만나 모의하고 결행한 호남창의는 순창에 이르러 의병대의 해산, 면암의 순절로 허망한 끝을 보았지만 당시 이에 참여하였던 돈헌을 비롯한 800여 우국지사들은 이후 각지에서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대항하여 혁혁한 투쟁을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면암이 이끌었던 의병부대가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출발하여 순창에서 해산되는동안 김상기 선생은 수십여 포수의 동원과 지방에서 일어선 의병의 초모에 크게 기여한 바 있었다. 순천에서의 패전후 일시 귀향하였던 김상기 선생은 곧 왜적에게 붙들려 순창 남원 담양등지로 끌려다니며 괴로운 옥고를 겪어야만 했었다. 그리고 1926년 5월 26일 마침내 망국의 한을 가슴에 안은채 72세의 나이로 복흥 사창에서 생을 마쳤다. 그의 작고소식이 알려지자, 전날 함께 활동한 동지인 담양의 금포 이항선이 달려와, 선생이 먼저 가시니 적을 쳐서 광복할 대계를 이제 누구와 다시 의논하겠느냐며 통곡하였고 원근의 많은 선비들도 찾아와 대한의 의사가 서거하였다며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