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설공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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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06-01-24 2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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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그는 성품이 겸근 정직하여 사물을 접함에 공손하게 하고 몸가짐을 검약이 있으면 비록 평소에 알지 못하였어도 반드시 흰 옷을 입고 가서 조문하였으며, 집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귀천을 막론하고 신을 거꾸로 신고 나아가 맞아 드렸다. 일찍이 병으로 누워 있을 때 순천군 채홍철이 문병을 와보니 베이불 왕골 돗자리에 숙여히 중이 사는 것 같았으므로 밖에 나와서 탄식하기를 [우리같은 무리가 공을 바라볼 때 이른바 땅벌레와 황학과 같음이라]고 하였으며 대제학 박의중과 한림학사 설장수는 상소하기를 공의 후손에게 대대로 음식을 주며 비록 죄를 지었다 하여도 용서하고 벼슬 길을 열어주라고 하였고, 서장관 홍사범 설공검, 설이검 형제를 상나라 이윤과 여상에 비교하였으며 대사성 이색은 주나라 소공과 태공에 비교하였다.
또한 공의 형제가 상소를 올려 성균관을 창설할 것을 제의했으니 성균관을 창립하여 문풍을 크게 진작시켰으며 목은 이색이 "공의 형제는 문장과 도덕이 당대의 으뜸이라 공자의 도를 크게 진작시킨 공이 있다."라고 하였다. 그의 아버지 8형제가 모두 경상에 올랐으며 3대가 원나라와 몽고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또한 경상을 지냈다. 1375(우왕 1)년과 1654(효종)년에 공의 후손에게 군보와 부역을 면해주라는 수교가 있었고 1319(충숙)년 종묘에 배향되었으며1314(충해2)년에 순창군 순창읍 성황사에 목상을 만들어 안치하고 이 지방의 수호신으로 1년에 4차례 제사를 받들었고 1386(공민17)년 개성 송애서원에 배향, 1788(정조12)년 순창군 팔덕면 배실리 무이서원에 주자와 더불어 고향 순창의 무리사에 배향되었다. 봉안문과 살량문은 좌찬성 송환기가 짓고 신도비문은 이조판서 민병승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