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설계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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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06-01-26 17: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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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계조는 바로 설자승의 10대손이며 고려 충렬왕때의 명신인 공검의 6대손이다. 그는 자를 홍서, 호를 만은이라 하였으며, 영의정 신숙주의 고종사촌 아우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재능을 갖고 건강하게 성장한 그는 35세때인 1443년(세종25)에 무과 호방에 급제하였으며, 그후 1453(단종1)에는 선략장군 용양시위사 후령호군으로 안평대군, 김종서 등이 연루된 이른바 계유정난 때 이를 평정한 공으로 1455년(단종3) 정월에 정난공신 3등으로 옥천군으로 봉작을 받았다.
이때 그는 전지 100결 노비 7구, 말 1필, 백은 10냥, 채단 안팎 한벌을 하사 받았다. 그후 1457년(세조3) 에는 군기부정으로 1458년에는 내자소윤, 1464년(세조 10)에는 경상남도 수군도안무처치사로 안주목사와 병조판서 등 여러 요직을 겨치다가 관직 에서 물러났는데, 이때 그는 고향인 순창에서 현재의 경남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로 이거하였다.
그는 그곳 수람영에 대를 쌓고 집뒤에다 정자를 지어 한가롭게 지내며 풍월을 읊고 낚시와 거문고로 유유자적하니 당시 사람들은 그 정자를 대부정이라 하고, 그곳을 옥천대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대부정 뒤 석벽에는 그의 사적이 기록 되어 있으며, 옥천대는 그뒤의 병난에 소실되었지만, 그 부근의 들은 지금도 옥천들이라 부른다고 한다.
한편 대부정에는 진사 박수량이 정자에 올라 옥천대를 바라보며 지은 시 24수를 선판에 기록하였고, 대부정의 살량문은 강양 이직현이 지었다. 노년을 벼슬길에서 물러나 이처럼 자연에 묻혀 한가롭게 지내던 그는 1486년(성종 17) 5월에 향년 69세로 타계하였다.
그 후 그는 현재의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의 시흥사에 봉안되었으며, 다시 그후 1595년(선조 28)에는 그 의 증손자 우범이 병마절도사로 선무원종공신 1등에 오른 공로로 좌찬성 옥천부원군에 추존되고 안양이라 시호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