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임차주(林次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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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06-01-26 17: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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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순창군 순창읍 충신마을 출신으로 일제 식민치하의 압정(壓政)과 민족차별의 불운한 환경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27세때 해방을 맞이하여 혼란스럽던 당시 사회의 안정을 도모하겠다는 일념으로 청장년층을 규합하고 치안봉사를 시작하면서 현실 정계에 입문하는 동기가 되었다. 이후 50년대에 이르러 보수집단 세력인 독립촉성회의 일원으로 본격적인 정치 수업에 들어갔고 대한청년단 순창군 단장에 선임되면서 정치적 야심을 키웠고 당시 여당인 자유당 순창군당 부위원장에 임명돼 확고한 정치기반을 구축하게 됐다.
1955년부터 1957년까지 2대에 걸친 수리조합장을 역임했고 1978년부터 재경 순창군민 향우회장을 2회 걸쳐 연임하면서 애향심 고취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또 집권당 자유당의 후광(後光)을받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의회에 처음으로 진출했으나 2년만인 1960년 4·19학생 운동으로 이승만 정권의 하야와 더불어 국회가 해산되어 의원직을 상실했다가 그해 7월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당선 됐다.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정당 전국구의원으로 추천되어 1963년 11월 26일에 의원직 승계로 등원한 것을 끝으로 정계를 은퇴했다.
3차례에 걸친 정치활동중 주요업적으로는 6·25동란으로 쌍치, 복흥, 구림면 지역의 전가옥이 소실돼 주민들이 어려움에 처해지자 구호양곡 긴급지원과 가옥신축 자재 공급 등 비상대책을 강구토록 정부에 강력히 요구 수용케 하는 등 복구에 최선을 다했고 농민들의 오랜숙원이었던 저수지, 양수장, 보수로 등 전천후 영농시설을 완공 농민들의 어려움을 덜게한 공적이 지금에 이르러서도 칭송이 높다. 또한 순창읍내에 분산되어 있는 이재민들을 열과 성을 다하여 보살펴 주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고 읍시가지 정비 차원에서 옛 관서당(官書堂) 거리에 50여동의 가옥을 새로지어 창림동(昌林洞)이라 명명(命名)하였으며 군립공원 사찰림의 소유권자 김모씨(金某, 남원)를 피고로 순창군민을 대표하여 소유권 무효반환청구소송을 제기 승소하여 순창관광협회로 하여금 관리케 하다가 1990년 군유지로 소유권 이전등기를 완료 하는 등 여러 업적이 군민들로부터 인정받아 1979년 순창군민의장 공익장을 수상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