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권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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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06-01-26 1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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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그리고 그의 본래 이름은 권도라 하였는데 후에 권집이라 개명하였으며 자는 수옥, 호는 화산이라 하였다. 이 호는 그가 후에 살게된 곳이 바로 화산 아래여서 사람들이 그를 화산선생으로 부르게 된데 유래한다고 한다. 화산은 태어나면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자라면서 점차 기상이 호매하였으며 학문을 깨우치는 명석함이 남다른 비범함을 보였다. 그리고 효성 또한 지극하여 8세때부터는 의대를 바로하고 아침저녁으로 부모께 인사올림이 마치 장성한 어른같았다고 한다.
그러는 중에 그가 11세가 되었을 때 그의 모친이 병이 깊어 자리에 눕게되자 그는 잠시도 모친의 곁을 떠나지 않고 8년동안을 한결같이 병구완을 하며 한편으로 매일 하늘을 향하여 모친의 쾌유를 빌었으나 모친인 박씨는 마침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모친은 병중에 있을때 감과 젓갈을 무척이나 먹고싶어 했다고 한다. 한데 병을 보는 의원이 이는 환자에게 대단히 해롭다고 하여 감과 젓갈을 드리는 것을 중지시킨 일이 있는데 이 일로 인하여 화산은 그후 평생을 감과 젓갈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또 3년의 시묘중에는 한번도 묘소를 떠난적이 없었으며 비가오나 눈이오나 그가 망곡하며 무릎을 끓고 앉았던 자리는 깊이 패어 풀이 돋아날 겨를이 없었고, 또 그가 모친을 여윈슬픔에 젖어 망연히 앉아있을때면 그 모습이 흡사 허수아비와도 같아 제비나 참새들이 놀라지 않고 친숙하게 머리 위를 날아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의 일이지만, 부친이 별세했을때는 눈을 뜬채 운명하여 염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눈을 감기려 해도 눈이 감기지 않았는데 화산이 간곡히 말하며 눈을 감기자 죽은 사람이 말을 듣는 듯 눈을 감으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부친의 별세후로도 그의 서모에 대한 효행이나 그 슬하의 남녀 동생들에 대한 우애 또한 지극하였다. 이처럼 그는 당시 사회의 가장 큰 생활규범의 하나라 할 효행이 모두의 귀감이될만 하여 선비들의 칭송이 있었지만 그는 이를 내세우고자 하지 않았다. 그의 효행이 널리 알려지자 당시 남원의 선비들이 읍지에 대학자였던 그가 도술을 부렸다는, 오늘에도 전해지는 전설화한 이야기와 또 그런 류의 것들을 기록한 자료등을 참고해보면 그는 아주 특이한 인물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는 세상에 나아가 명리를 취하려 하거나 경륜을 펼쳐보이려 하기 보다는 조용히 산간에 묻혀 학문을 탐구하고 후진교육에 온 정열을 쏟으며 살았다.
그가 살고있던 숙종조(재위 1675-1720) 에도 당파싸움은 계속되어 이에 연류된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었는데 이러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그로 하여금 산간에 묻혀 살 마음을 갖게한 한 원인이었겠으나, 그는 그의 제자 들에게도 일찍이 오늘같은 세상을 살면서는 당론에 가담하여 소장을 올린다거나 하는 일을 삼가야 할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이는 1701년(숙종27)에 사약을 받고 죽은 희빈장씨의 아들(후의경종)이 후일 왕위에 오르면 또 한번 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화산 권집은 1716년(숙종 42) 3월 3일 그가 살던 적성면 괴정리 서림마을에서 일생을 마쳤다.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였으며 그의 부인 이씨는 그보다 8년 전에 타계하였다. 그리고 그의 묘는 마을에서 5리되는 곳에 있으며 부인은 처음 화산에 묻혔다가 후에 그와 합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