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국동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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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06-01-26 17: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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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어려서부터 남다른 기개와 호방한 성품을 지닌 그는 마을의 또래들과 어울릴때면 진놀이를 좋아했다고 하며 혹 누가 장래의 희망을 물으면 서슴없이 장차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충신이 되겠다고 하였다 한다. 그가 의병으로 구국의 길에 나선 것은 그의 나이 38세때의 일이였다. 그의 의병으로서의 활동에 대해 [전부의병사][독립유공자 공훈록]등을 참고해보면 그는 한동안, 지난 1896년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평리원(이조말의 관청으로 고등재판소를 개칭한 기관)에 수감중 탈출하여 다시 1907년에 거의 하여 수백의 의병을 이끌고 혁혁한 투쟁을 전개한 기삼연의 의병부대와 역시 같은 해인 1907년 정재 이석용(임실군 성수면 출신)과 함께 [창의동맹단]을 조직하여 남원 임실 등지에서 왜적과 싸웠고 이후 다시 [대동창의단]을 이끌고 전남.북의 여러 지역에서 왜적을 맞아 싸운 해산 전기홍(임실군 둔남면 출신) 의병대의 후군장으로 활약하였다고 하나, 거의 독자적으로 소규모의 의병대를 조직하여 그들을 이끌며 활동하였다.
그는 1907년 우국지사 49여명을 규합하여 왜적과의 투쟁에 나섰다. 그리고 그는 활동하는 동안 동완이라는 이름외에도 차서, 치원, 호남등의 이름으로도 불리었음을 보게 되는데 그의 이름이 이처럼 여럿인 것은 항상 자신을 숨기고 비밀리 투쟁활동하는데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1908년 1월, 전남 장성군 황룡면 탐정리에서 국동완은 왜적과의 첫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그들은 왜적 10여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사기가 높아진 대원을 이끈 국동완은 이해 2월 19일에는 전남 광산군 비아면 비아리에서 다시 왜적과 맞서 하룻동안 접전을 벌이면서 5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비아 전투 이후 3월 7일부터 그는 이름을 호남이라 바꾸어 부르며 3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흥덕군(지금의 고창군 흥덕면) 후포리에 있는 일본인의 집을 습격하여 그곳에 있던 왜병 2명을 사살하는 한편 일화 200원과 엽전 100냥을 몰수하여 군자금으로 쓰면서 활동하였다. 이어 3월 13일에는 고부군 소성면의 전투에서 그리고 같은 달 18일에는 고부군 서부면 중리에서 일본인 경찰과 접전을 벌여 많은 적을 사살하고 총포와 화약 등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그해 4월 9일 이후에는 고창군의 방장산, 무장군의 선운사, 흥덕군의 입헌촌, 부안군의 입하면, 하서면 등 10여곳을 이동하면서 왜군을 찾아 괴롭히고 전투를 벌여 사살한 적만해도 20여명이 넘었다. 그는 40여명의 적은 수로 조직된 부대를 이끌고 신속 기민하게 움직여 왜적이 예측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본 경찰이나 헌병이 주둔하는 곳을 찾아 다니며 불시의 기습으로 타격을 주는가 하면 때로는 왜적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여 피해를 주는 등 실로 다양한 전략 전술을 펼쳤던 것이다. 또한 그는 변장술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때는 괭이나 삽을 둘러맨 농민으로 변장하여 왜적이 있는 곳에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때는 가사를 입은 중으로, 또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선비로 변장해 가면서 왜적의 눈을 속이며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1908년 4월 29일 이후에는 이름을 다시 치원이라 고쳐 쓰면서 부안, 고부, 흥덕등지에서 활동하였고 5월 30일 이후로는 다시 이름을 호남으로 바꾸어 사용하였다. 5월 30일. 그는 부하 8명을 인솔하여 고부군 거마면 평교리에 살고 있는 일본인 대삼오랑의 집을 습격하여 총과 칼 그리고 실탄 다수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는 이처럼 적은 수의 의병대를 이끌면서 적의 허를 찌르는 전법으로 왜적을 놀라게 하고 또 많은 피해를 주며 종횡무진 맹활약을 전개해 나갔다. 1909년 9월 6일. 그날 고창군 고창읍 동남 10여리 쯤의 금곡에서 40여명의 동지 의병들과 함께 일본 헌병대에 포위되어 그만 체포 당하게 된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 구금된 그는 그날부터 악명 높은 헌병대의 견디기 힘든 고문을 받으며 지내야 했다. 당시 그들의 요구는 다른 의병동지들의 행방과 인적사항을 밝히라는 것이었는데 모진 고문과 협박 속에서도 그는 굳게 다문 입을 끝내 열지않고 버티다가 전남의 영광 헌병대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같은 해인 1909년 10월 10일 영광헌병대에 의해 총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