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최산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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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06-01-26 17: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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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최산홍은 1906년 10월 15일 이경춘이 동지 120여명을 규합하여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일어섰을 때 이에 가담하여 활약하였다. 현재의 구림면 율북리 통안마을에 살며 잡화상을 하던 그는 당시 23세의 젊은 나이로 이경춘이 이끄는 의병대에 가담하여 도십장 또는 전포장으로 총기 80여정을 휴대하고 태인, 부안등지에서 왜적과 싸우며 활약하였던 것이다. 이때의 이경춘 역시 아직 그의 출신지나 인적사항이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경춘 의병대에서 활약하던 최산홍은 이듬해인 1907년 11월 7일부터는 이석용(임실군 성수면 출신) 의병대장과 1908년 4월까지 총기 100여정을 휴대하고 임실 남원 진안 용담등지의 여러 고을을 돌며 왜적과 대치하여 싸우며 의병대의 검찰이라는 직무를 맡아 활약하였다. 이 기간중 1908년 1월 9일 밤에는 부하 10여명과 함께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에 가서 김대춘과 김봉근을 시켜 변대규를 연행하여 군자금을 내라고 했는데 불응하므로 그의 집으로 끌고가서 엽전 100냥과 백목 3필을 몰수하여 군자금으로 사용하였고, 그해 3,4월에는 임실군 상동에서 이석용 의병대장의 작전지시에 따라 임실읍의 수비기병대와 순사주재소를 습격하기로 계획하고 다음날 밤에 이석용 대장과 100여명의 동지와 함께 100여정의 무기로 무장하고 출동하여 기병대화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때 그들은 기병 1명을 사살하고 2명을 부상케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후 1908년 6월부터는 양춘영(순창군 구림면 금천리 출신) 의병대장과 활약하였다. 당시 양춘영은 앞에 잠깐 소개한 1906년의 면암 최익현의 의병이 일어섰을 때 이에 동참했다가 의병대의 해산으로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곳곳의 동지들과 만나며 재기의 기회를 노리다가 1908년 여름에 구림면의 회문산을 근거지로 삼고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최산홍은 양춘영이 의병을 일으킬 때 처음부터 동참하여 의병대의 중군장의 직책을 맡아 의격문을 지어 각지에 보낼 때 양춘영과 함께 이름을 실었으며 그 다음해인 1909년 10월 10일에 통안리의 허기삼의 집에서 왜적에게 체포되었다. 허기삼의 집에서 체포된 최산홍은 곧 전주로 이송되어 그해 12월 27일 광주재판소 전주지부에서 폭동, 모살, 강도 및 방화의 죄명으로 교수형을 선고 받았으며 대구 공소원과 고등법원에 항소했으나 기각당하였다. 그리하여 그는27세의 꽃다운 젊은 나이로 망국의 한을 가슴에 안은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