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전설(조헌의 수제자들 ) |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06-01-26 22:54 |
- 0건
- 1,915회
본문
● 채록자 : 양정욱
● 채록장소
인계면 노동리 조헌(趙憲)의 본관은 백천(白川)이고 자는 여식(汝式)호는 중봉(重峰)인데 이이(李珥)의 문인으로 성리학의 대가이며 문신 의병장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참가하여 금산전추에서 칠백의사와 더불어 순절하였는데 그 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하였으며 문열(文烈)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가 의병장으로 출전하자 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랐는데 그 중에는 우리 순창출신자가 있어서 그 충절이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순창출신자가 있어서 그 충절이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순창출신자로 금산의 충절 한응성(韓應聖)은 본관이 청주(靑州) 이고 자는 경기(景期)며 아호는 귀와(龜窩)이다. 1557년(명종 12년)에 임실군 삼계면 어은리에서 용양위대호군 축(軸)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지재가 과인하여 15세 때 벌써 경전에 통달하고, 특히 용력이 초인하여 냇물도 한번에 뛰어넘고 한꺼번에 세 마리 말을 다루는 승마술을 익혔다. 그의 형 응현(應賢)이 그때 고부에 살았는데 백여리가 넘는데도 밤에 가서 일을 보고 다음날 아침 일찍 자기집에 돌아와 있는 일이 예사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축지법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남원양씨가에 입장하여 동계면 귀미마을에 와서 살았는데 유학의 대가인 중봉 조헌을 찾아서 사사하였으며 틈틈이 활을 쏘고 말을 달리며 체력과 전술을 익히는 일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때 선조께서는 유학을 장려하고 사람을 우대하였으나 집권한 사림파끼리 동서붕당이 일어나서 조정은 소란하고 사회는 불안하였다. 언제나 외적은 내분에서 불러들이기 마련이다. 당시만해도 이율곡 선생의 십만양병설을 반대하고 오히려 겁쟁이로 몰아세운지 꼭 십년만에(1592) 임진왜란이 터졌는데 왜군은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해 진격하여 오므로 조정은 속수무책으로 선조대왕을 모시고 개성ㆍ평양ㆍ의주까지 몽진하니 2일이 채 못 되어 서울이 함몰되고 이어서 전국이 그들의 발굽에 유린당했다. 이때 조헌은 관군이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 몇 사람과 의병창의를 결의하고 격문을 발표하고 의병을 모집했다. 전국의 장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한응성장군도 이때 스승을 따라 구국의 대열에 올랐으며 금산전투에서 순절할 때까지 스승이자 의병장인 조헌의 곁에서 일거일정을 같이하였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일천육백명의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출진하였는데 먼저 이미 점령당한 청주성으로 진군하여 일거에 수복한 다음 영규의 승병과 합류하여 금산성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금산성에는 적의 주력부대인 고바야시가 인솔한 대부대가 전라도를 공략할 목적으로 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런데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은 청주성을 수복하고 다시 금산에서 적병을 무찌르고 있는 조헌을 보자 자기에게 불이익이 올 것을 걱정한 나머지 조헌의 의병활동을 여러모로 방해하게 되자 많은 의병들이 의기소침하여 뿔뿔이 흩어져서 돌아갔으므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최후의 격전에 들어가게 된 그해 8월 18일에는 결사대 700명의 의병이 남았는데 전세가 매우 불리한 것을 알면서도 결사보국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장렬히 싸워서 순절하였다. 물론 한응성 장군도 스승 조헌과 함께 순절하였는데 여기에는 충복의 미담 한 토막이 있어 특히 감동을 주었다. 사실 금산전투에서 산화한 700 의사 중에서 그 유해를 거두어 안장한 이는 그리 많지가 않았다. 그것은 그때 상황이 살벌한 전쟁터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유해를 거두어다가 선산에 안장한 이는 바로 한응성 장군인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한응성 장군이 의병창의를 할 때 많은 가동들과 함께 출전하였는데 그중에 부협(夫脅)이라는 종복이 있었다. 그런데 부협은 평소에도 장군의 신임을 받아 가까이 두었는데 전쟁터에 가서도 한시를 떨어져 있지 않고 그림자처럼 곁에 따라다니며 상전을 도왔다. 금산전투에서도 마찬가지로 공을 엄호하며 왜적과 싸웠는데 싸움이 끝나고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도 전상을 입고 기절했다가 깨어났지만 큰 중상은 아니었으므로 그 많은 시체더미 속에서 얼마를 헤맸던지 마침내 한응성 장군의 유해를 업고 도망해 온 것이다. 금산에서 순창까지는 실로 먼직이지만 날이 새기 전에 고향 집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기진맥진한 부협은 비참했던 금산전 투의 상황을 대강 전한 다음 공을 지키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자기의 죄라며 대성통곡하고 비통한 끝에 할복자결하고 말았다. 공의 자손은 공의 유해를 선산에 장사지내고 공의 묘 계하에다가 충복 부협의 묘를 만들어 해마다 공과 함께 향사하고 있다. 후에 조정에서는 공에게 통정대부를 추증하고 충정을 내렸는데 공의 충신각은 순창 인계면 노동마을 앞에 서있다. 절사조연관은 본관이 옥천이요, 자는 사홍(士弘)이며 호는 모충제(慕忠齊)이다. 1557년에 순창군 구림면 치내마을에서 팔우정 응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상이 활달하고 재주가 남다르더니 일곱 살에 효경을 통독하고 주자의 팔자부를 써붙일 정도로 문필이 좋았다. 스무 살 때 조헌의 문하에 들어가 사사하며 학문을 닦았는데 중봉은 그 때부터 공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여러 제자들 앞에서 말하기를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충절을 세월 사람은 바로 사홍(士弘)"이라고 하면서 사랑했다고 한다. 또 어느날 선생을 모시고 후원을 소요하던 중 천기의변이 나타나자 공은 크게 탄식하고 이는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조짐 이라며 스승에게 가르침을 구했다고 한다. 이때 스승이 하는 말이 "전쟁을 막는 길은 옳고 곧은 선비가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틈만 있으면 병서를 읽고 말과 활 그리고 칼 쓰는 법을 익히는가 하면 열사전을 탐독하여 심기를 길렀다. 그로부터 10년 후에 공의 예언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스승 조헌이 의병장이 되어 창의하자 공은 평소에 길고 닦아온 충절과 무술을 바탕으로 보국제민의 길을 결심하고 부적가를 지어부르며 의격문을 반포하고 사민들을 깨우치자 사방에서 모여든 의병이 500명이 넘었다. 공은 출전 직전에 부인을 만나 말하기를 "나는 나라가 위태로워 싸움터로 떠나매 생사를 예측할 수 없으니 부인은 지금 태아가 몸에 있은 즉 만일 남아를 낳거든 형이 이미 무사하니 형의 후사를 이어 종사를 중희하도록 하시오"라고 간곡히 부탁 하였다. 부인은 안색을 바로하고 대답하기를 "첩도 종사의 중요함을 아오니 너무 심려 마시고 오직 신하된 직분으로 충성을 다하옵소서" 하였다. 이는 삼강에도 맞는 말이니 그야말로 그 남편에 그 아내라 할 수 있겠다. 공은 중봉선생과 함께 출전하여 함락된 충주성을 수복하고 금산전투에 참전하였다가 700의사와 더불어 장렬히 순절하였는데 먼저 적탄을 맞고 쓰러진 중봉 선생은 사랑하고 아끼는 제자 조연관의 손을 꼭 잡고서 최후의 군령을 내렸다. "그대는 빨리 이곳을 떠나 흩어진 군졸을 수습하여 적군을 몰아내고 나라를 구하라"하였다. 공은 스승이자 대장인 중봉의 최후명령을 받고 그대로 하였다. 그동안 흩어진 의병들을 모아서 추촌에 진을 옮겨치고 주변에 섭을 묶어서 허수아비를 만들어 군졸로 위장하여 동문을 쳐부수며 말을 달려 섭에 불을 지르니 적군은 불을 끄느라고 정신없을 때 기병으로 하여 금 쇠북을 치며 함성을 지르며 적진에 돌진하여 많은 적병을 참살하고 장렬하게 순절하니 때는 1592년 9월 7일이며 공의 나이 35세였다. 더욱 슬픈 일은 금산에서 유해를 수습하지 못하여 그 아우 여성(汝城)이 적성면 동정리 뒷산에 초혼장 하였는데 공의 유복자 의효(義孝)는 15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의 복을 3년 입고 시묘살이 하였다. 조정에서는 안문어사를 보내고 그 집을 구휼하여 부역을 면제하는 한편 토지를 하사했다. 또 1819년(순조 19년)에는 조정에서 사헌부 지편을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