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지명전설(현인이놀던 낙덕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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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06-01-26 2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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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록자 : 양정욱
● 채록장소
문화연구소 순창읍에서 복흥면 소재지로 가자면 도중에 낙덕 저수지를 채 못 미쳐 가서 외송마을로 들어가는 다리 건너편을 보면 깎아지른 듯한 암벽 위에 노송이 빽빽이 들어서 우거진 숲이 있는다. 그곳(복흥면 상송리 산4번지)를 낙덕암이라 하고 그 우거진 숲속에 팔각정자가 있는데 이름하여 낙덕정이라 부른다.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440여년 전 명종 때의 명유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선생이 즐겨 놀던 곳으로 산자수명하여 경치가 빼어나고 지세가 교묘하여 서기가 머물다 가니 황학과 백로가 떼지어 날아와서 선생과 벗하였다고 한다. 한참 뒷날 5대손인 자연당 김시서(自然堂 金時瑞)가 이곳에 와 살면서 선조의 유적을 지켜온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도 그 후손들이 근동에서 세거하고 있다. 일찍이 풍수설로도 길지로 소문난 곳이며 이곳은 뒷날 훌륭한 인물이 나올 것이라는 설이 있었는데 1900년(고종 37년)경에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그 후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선생이 이곳에서 공부한 일이 있었다고 하니 전설로 내려온 명당설은 사실로 증명이 된 셈이다. 어쨌거나 김하서 선생의 태생지는 장성맥동이지만 학문을 대성한 만년에는 복흥면 백방산 아래에 살았기 때문에 순창인물이라 해도 하자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출생지를 기준으로 한 역사기록에는 장성에 성인출이라 하였으니 그도 또한 맞는 말이다.
그리고 하서 김인후 선생은 을사사화(1545년)이후에 칭병하고 관직을 떠나 향리에 돌아와서 학문에 정진하여 대유가 되었는데 후에 동방 18현 중의 한 분으로 우리나라 문묘(공자묘)에서 배향하는 혈식군자가 되었다. 시호는 문정공이며 유등면에 있었던 화산서원에서도 제향한 바가 있다. 선생의 학문은 높고 무궁하여 이미 현유의 경지에 올랐는데 하찮은 서생 따위가 감히 그분의 학문을 논할 수는 없고 다만 그 생애에 대하여 대강을 말하자면 선생의 본관은 울산(蔚山)이요 자는 후지(厚之)이며 호는 하서(河西)다. 1510년(중종 5년)에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맥동리에서 참봉 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지재가 과인하여 다섯살 때에 아버지가 천자문을 가르치는데 조용히 듣고만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아버지는 걱정하기를 혹시 벙어리가 아니면 귀머거리가 아니냐고 의심한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에 살펴보니 공부방 벽이고 창호지고 간에 손가락에 침을 발라 빽빽이 써놓은 것은 천자문의 한질 분량의 글씨였다. 이것을 본 아버지는 비로소 안심하고 "과연 신동이로다"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이 여섯 살이 되던 해 어느날 글 잘하는 선비 한 분이 와서 하늘 천(天)자를 제목으로 운(韻)을 띄우고 글을 지으라고 하니 별로 당황하거나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곧바로 응하여 가로되 "형체는 둥글고 지극히 커서 아득하기만 한데 호호공정하여 대지를 두루 쌓네 공간이 넓어 만물을 삶게 하거늘 이 나라 사람은 어찌 무너질까 두려워 하였던가"라고 읊자 사람들은 모두 놀라 신동이라 하였다. 이 무렵 조원기(趙元杞)가 전라관찰사로 내려왔는데 선생의 문재를 사랑하여 팔세동이 소년을 무릎에 놓고 시험삼아 글제 를 내면 곧바로 연시답구하니 놀랍고 기특하여 "장성신동이 천하문장"이라 극찬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후에 김안국의 문하 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여 당대 대유가 되고 혈식 군자가 되었다.
1531년(중종 26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서 퇴계 이황 선생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였다. 1540년(중종 35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 등용되었다가 사가독서하였고 곧이어 홍문관 정자, 박사, 세자설서 등 청요직을 역임하다가 1546년(명종 1년)에는 70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은 옥과현령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을사사화(1545년)로 인하여 많은 유현들이 참화를 입자 선생은 통분하여 병을 빙자하고 관직을 떠났다. 말년에 순창 복흥면 백방산 아래 점안촌에 우거하면서 학문에 정상을 넘나들며 자연과 더불어 여생을 마쳤는데 1560년(명종 15년)에 향년 51세로 돌아가시자 수많은 사람들과 조야는 모두 슬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