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전설(설공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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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06-01-26 2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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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록자 : 양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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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설공찬전은 조선왕조 최대의 필화사건을 일으킨 작품으로서 중종(1511)때 왕명으로 수거돼 불태워진 후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으로만 알아온(1449~1515) 한문소설인데 최초의 국문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1618)보다도 100년이나 앞서 나온 한문소설이다. 뿐만 아니라 소설에 나온 무대가 순창이고 소설에 나온 주인공들이 순창사람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며 순창에서도 명문 설씨를 설정한 것은 더욱 희안한 일이다. 그러니까 소설사적 차원에서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데 김시습의 금호신화(1465~1470)가 나온 40여년 후에 설공찬전(1511)이 나오고 그로부터 또 100여년 후에 홍길동전이(1618) 나온 셈이다. 한편 조선전기 인물인 어숙근의 패관잡기에서는 이 작품의 제목을 설공찬 환혼전으로 부르면서 그 작품의 말미에 있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설공찬이라는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갔다가 그 혼이 돌아와 남의 몸을 빌어 수개월간 이승에 머물면서 자신의 원한과 저승에서 들은 일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는 내용은 윤회화복에 관한 이야기로서 당시 많은 백성들이 그 내용을 믿어 한문으로 베끼기도하고 국문으로 번역하여 전파되는 등 대단한 인기를 모으게 되자 사헌부에서는 이 작품이 혹세무민한다는 이유로 중종 임금에게 주청하여 마침내 왕명으로 이 작품을 수거하여 불태워버린 것이다. 한편 작자인 난재채수는 중종반정의 당당한 공신이면서도 이 작품을 쓴 죄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교수형에 처해질 뻔하였다가 중종의 특별한 배려로 겨우 사형만은 면했으나 파직당하고 말았다. 한편의 고소설을 두고 이처럼 단호하고 진지하게 공식적인 문헌에서 거론된 일은 일찍이 유래가 없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까지 여러 군데(조선왕조실록 중종 6년 9월 2일 조이하 기사)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 당시 설공찬전이 던진 충격과 파문은 실로 전무후무한 것인데 남녀 상하층 독자의 인기를 폭발적으로 모았음을 알 수 있고 또 조정에서도 그 영향력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적극 대처하였을 것으로도 확인할수 있다. 이와 같이 수백년 전에 왕명으로 금서가 된 설공찬전은 세상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다만 기록에 있어 그동안 학계에서는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였는데 지난 1996년 9월달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에서 탈초위원인 이복규씨가 묵제일기 탈초작업중 우연히 발견하고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으나 아쉬운 점은 전부가 아닌 일부분만이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말로만 전해 들었을 뿐 전혀 알 수 가 없었던 설공찬전을 일부분이라도 발견하게 된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며 그것만 가지고도 대충의 내용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니 다행한 일이다. 그러면 원래는 한문소설이었지만 국문번역판을 발견하였고 국문번역판도 이해하기 어려워 국문본을 현대말로 번역하여 설공찬전을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