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전설(비홍산성의대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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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06-01-26 2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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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록자 : 양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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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계면 도사리 자택 세칭 여말의 삼부인이라고 하면 고려조직제학 양수생(楊首生)의 부인 이(李)씨, 진사 동극을 (東克乙)의 부인 유(柳)씨, 한림 김문(金問)의 부인 허(許)씨를 이름인데 이 삼부인을 특별히 여말 삼부인으로 지칭한 것은 그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 하나는 같은 시대에 태어나 비슷한 처지에 있었고, 두번째는 그 사정이 똑같이 급하게 되자 동시에 개경을 떠나 남행 길에 오른 사실, 세번째는 뒷날 그들의 집안이 비슷하게 번창한 점 등이다. 고려의 왕실이 쇠퇴하여 조정이 불안하고 민심이 흉흉하던 고려 말 우왕 때의 이야긴데 앞서 말한 여말의 삼부인 중 하나격인 이씨부인에 관한 이야기다. 이씨부인은 시아버지가 대제학이요, 부군이 직제학으로 왕실과도 특별한 관계를 맺고 지낸 명문이였는데 어느 때 갑지기 대제학과 직제학 부자가 거의 동시에 죽게 되니 일조에 집안이 몰락하여 개경을 떠나게 되었다. 슬하에는 유복자로 얻은 아들이 하나 있었으며 때마침 처지가 비슷한 유씨부인과 허씨부인이 있어 남행길을 동행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씨부인은 부군의 시골인 남원땅을 찾아가지만 유씨와 허씨부인은 특별한 목적지도 없이 그저 위험하고 어지러운 개경을 벗어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고, 그러다가 적당한 곳이 있으면 아무데나 정착할 셈으로 무작정 개경을 떠난 것이다. 또 세 부인에게는 각기 몇 명씩의 종복이 따랐는데 이들은 동냥을 하고 걸식을 하다가 먼저 상전들을 대접하고 자기들도 살면서 그야말로 무전여행을 강행하면서 남쪽으로 행하는데 연약한 여인네들은 천리길을 밤낮없이 걷다보니 발에서는 유혈이 낭자하고 팔다리가 늘어져 운신조차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일행이 많다 보니 잠자리 얻어들기도 어려웠다. 그럴 때면 옴팍한 언덕바지에라도 노숙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으며 끼니를 거를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니 곱고 편하게만 살았을 내당아씨들은 매우 힘들고 지쳤지만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죽어도 가야하고 죽을 때까지 가는 것만이 그들이 할 일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내려왔는지 마침내 충청도 땅에 당도하였다. 연산땅에 들어서자 김한림의 부인 허씨를 불러놓고 이땅은 부인이 양자손하고 살 땅이니 여기에서 머무르도록 하시오 하며 서로 이별을 아쉬워하며 헤어졌다. 그리고 또 얼마를 더 가다가 회덕땅에 당도하자 송진사의 부인 유씨를 불러서 이곳은 부인의 땅이니 이곳에서 양자손하며 복록을 누릴 것이요 하며 섭섭한 이별을 못내 감추지 못하였다. 이렇게 하여 동행했던 허씨부인과 유씨부인을 떼어놓고 남원을 향하여 남행을 계속한 이씨부인은 며칠 후에야 남원부 교룡산 아래에 있는 고택을 찾아가 정착하였는데 얼마 안가서 난리가 났다. 정읍재란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재산과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뒷산에 성을 쌓아 그리로 옮겨갔다. 하루는 이씨부인이 성 안에 우물을 팠는데 단물이 용출하였으며 그 물이 많아 수백 명이라도 능히 먹고 남을 만큼 넉넉 하였다. 그러나 평난이 되면 곧 산성을 내려가 옛집으로 돌아가야 되는데 그보다는 새로 좋은 터를 잡아서 자손들이 오래도록 복록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축복받은 땅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성 안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라 사방의 산의 정기를 살피는데 서북간방으로 보이는 순창땅 구악산(무량산)이 매우 수려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저 산 아래라면 내 자손이 살 만한 곳이 있겠구나 생각하고 버드나무 세가지를 꺾어다가 기러기(목매) 세 마리를 만들어서 한 마리는 적성 운림 농소막으로 띄우고 또 한 마리는 귀미로 띄우고 또 한 마리는 마흘리로 띄웠다. 잠시 후에 되돌아온 나무기러기를 살펴보니 농소막 이씨부인의 산소자리에 내려 앉았다가 돌아온 놈은 명감 열매 하나를 입에 물고 돌아왔으며 귀미마을에 있는 녹갈암에 앉았다가 돌아온 놈은 입에 구슬을 한 움큼 머금고 돌아왔으며 마흘리 팔명당 자리에 앉았다가 돌아온 놈은 기운은 좋은데 상처를 입고 돌아 왔다. 이를 본 이씨부인은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농소막에 내신위지지를 정하면 이후에 내 자손이 적성강 물이 마르도록 번성할 것이요 마흘리는 대명당이기는 하나 그 자손에서 불상사가 있을 것이니 자손에 허갈이 난 내가 어찌 부귀만을 취할 것인가 하고 귀미 녹갈임터는 내 자손이 백세토록 복록을 누릴 곳이니 그곳이 가히 내가 살 터로다 하며 곧바로 그곳을 찾아갔는데 과연 녹갈암 일대에는 정기가 어려있고 그 자리에는 이미 오두막 한 채가 지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주인을 만나서 이 터는 내 것이니 비워 달라고 하였으나 주인은 좀처럼 듣지 않고 말하기를 "이 터가 내 것이 아님은 사실이나 따로 주인이 있는 땅이니 댁도 어서 돌아가는게 좋겠다" 말하는 것이었다. 집주인은 도사였는데 수년 전부터 이곳에 와서 움막을 치고 터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 터 주인이 누구란 말 인가. 누구이기에 그대가 와서 지키고 있단 말인가?" 하였더니 도사가 말하기를 " 나도 모르는 사람이요. 다만 구악산 산신령 이 내게 말하기를 이 터 주인이 곧 찾아올 때가 되었으니 그대는 이 터를 지키고 있다가 주인이 오거든 넘겨주라 하였소" 하였다. "그렇다면 주인도 모른다면서 어떻게 주인을 알아 볼 것인가" 하고 묻자 도사가 말하기를 "주인을 만나 본 일은 없 으나 성씨가 양씨라는 것은 알고 있소"라고 하였다. 이씨부인은 그제서야 안심을 하고 내 등에 업힌 아이가 바로 양가 성을 쓰고 있으니 이 터의 주인이 아니냐고 반문하자 도사는 두말없이 벌떡 일어나 큰절을 넙죽 하고 나서 몰라뵈어서 죄송하고 이제 주인이 왔으니 떠나겠다고 하면서 몇가지 세간을 챙겨가지고 바람같이 사라져갔다. 그로부터 이씨부인은 이곳에서 살면서 집터를 넓히고 새 집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하루는 취암사에 있는 중 하나가 나타 나서 이 터는 이미 오래 전에 자기가 봐둔 곳이라며 터를 비워달라는 것이었다. 처음은 달래도 보고 위협도 해보았지만 좀처럼 단념하지 않고 덤비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그 중이 내기를 해서 진 사람이 물러가기로 하면 어떻냐고 제안을 해왔다. 이씨부인은 짐짓 못이기는 척하고 내기를 하게 되었는데 달걀을 한 망태를 갖다 놓고 중이 먼저 시작하였다. 방 한가운데서 외줄로 달걀을 쌓아올리는데 천정까지 닿도록 쌓고 자신있게 뻐개면서 "이제는 당신 재주를 좀 보여주시오" 하고 호기를 부렸다. 이씨부인은 가소로왔지만 태연하게 그러자고 하고 달걀을 쌓는데 이번에는 천정에서부터 외줄로 쌓아 내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을 본 중은 채끝나기도 전에 벌벌 떨면서 미처 몰라 뵈어서 죄송하다며 오금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가 버렸다. 물론 그때 이후로 그 중이 다시는 오지 않았으며 이씨부인은 그로부터 마치 창업을 하는 여왕처럼 많은 가족들을 이끌고 은은하게 살았다. 하루는 구악산으로 사냥을 떠난 아들이 송아지만한 멧돼지한 마리를 잡아왔는데 그 뱃속에서 무량(無量)이란 두 글자가 선명하게 박힌 푯말 하나가 나왔다. 그리하여 고기는 동네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그후부터 구악산을 무량산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앞뜰은 개간하여 전답을 늘리고 무량산에는 과실나무를 심어 생업에 기본을 삼았다. 그런데 아들 사보는 활쏘기를 좋아하고 말달리기를 즐겨하였으며 틈만 있으면 가동을 거느리고 무량산에 올라가 사냥하는 일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리하여 걱정 끝에 하루는 이씨부인이 자리에 눕게 되었는데 그날도 늦게야 사냥길에서 돌아온 아들이 어머니 머리맡에 꿇어앉아 그 까닭을 물으니 이씨부인은 대답하기를 "문득 죽고 싶어 그런다. 하늘 아래 너 하나를 믿고 갖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이제 네가 책은 접어두고 사냥에만 열중하니 언제 공부하여 가업을 이어받 겠느냐. 더 기대 할 것이 없는데 살아서 무엇하리" 라고 하였다. 아들 양사보는 어머니 말씀에 크게 뉘우쳐 그날로 활과 사냥도구 일체를 불태우고 한 마을에 사는 김주서(명원부원군 김광을)에게 글을 배워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고 함평현감을 지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순창에 들어온 남원양씨의 입향조이다. 이씨부인은 전성의 영화를 누린 것이다. 그리고 그때 이씨부인이 잡은 터에서 오늘까지 618년간 계속 그 자손이 살고 있으며 그 자손 중에서 이조 오백년 동안 사마가 30장, 문과가 10장, 무과가 10장, 음직이 12장, 천거가 9장, 특제가 4장, 그밖에 증직은 부지기수이고 학행이 높은 유현은 27명을 배출하였다. 또 공신록권이 3장이며 의병장을 9명 배출하고 손세는 일만오천명에 달하고 있다. 불가에서는 인과응보설을 믿고 있거니와 대저 남원양씨의 이와같음은 과연 무엇에 비 할 수 있을 것인가. 후세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씨할머니의 크고 높은 덕행이 그 후손에게 복록으로 내린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순창과 남원의 경계선상에 있는 비홍산 혹은 비홍산성은 그때 이씨부인이 나무기러기를 날렸던 곳이라 하여 비홍산 혹은 비홍산성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이 부분은 남원의 용성지에서도 비홍산성은 숙인 이씨부인이 쌓았으며 성 안에 우물이 있는데 그 이름을 고정 또는 할머니샘이라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