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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제목 인물전설(열녀 간아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06-01-26 22:38

본문

● 제보자 : 류한상
● 채록자 : 양정욱
● 채록장소
  광주 문화동 간아지는 순창군의 관비이며 훈도 유문표의 관첩이다. 그리고 시대는 성종~중종(1473~1523)년간의 인물로 추정된다. 그 근거로는 유문표의 아버지인 생원 유인흡은 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성원의 재종형인데 단종 때 사육신의 화를 당하여 1456년 (세조 2년)에 호남의 순창으로 내려와 살았는데 그때 유문표의 나이 네 살 적이었다. 그로부터 순창에서 성장하였으며 성년이 된 뒤에 담양 고을에 사는 성주 현씨(玄氏)가에 입장하게 되었는데 얼마 후에는 처향인 담양 창평의 얼그실로 이거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유문표는 창평 얼그실 마을에 최초로 들어간 문화유씨(文化柳氏) 의 입향조이며 그때 지였다는 종가집 와송당(臥松堂)은 그 후손들이 대대로 세거하여 5백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고색이 창연 하여 지난날 전성하였을 때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전남도 문화재 자료 192호) 어쨌거나 훈도 유문표가 늦도록 아들이 없어 영암 월출산에 빌어서 만득으로 아들을 낳았다. 그가 곧 석헌 유옥(石軒 柳沃) 이다. 유옥은 무안현감 재임시에 순창 강천계곡에서 순창군수 김정, 담양부사 박상과 더불어 중종비 신씨(愼氏) 복위 상소문 을 성안 상계한 삼인대 삼선생(三印臺 三先生) 중 한 분이다. 그러니까 아들을 낳은 때가 1487년(성종 19년)이고 유문표의 나이 35세 때 일이다. 그러므로 유문표가 화순에서 유생훈도를 지낸 것은 이 무렵이었을 것인데 순창의 유생훈도로 부임한 것은 어느 때인지 확실치 않다. 전설대로 영암 월출산에 빌어서 만득으로 아들을 보았다면 적어도 아들을 본 후에나 집을 떠났을 것이며 따라서 40대 후반에 순창군의 유생훈도로 있으면서 간아지(干阿之)를 만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간아지는 성종ㆍ중종년간의 인물로 추정해도 큰 하자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간아지가 유문표의 관첩이 된 연유 로는 유문표가 평소에 지행이 있었으므로 선비를 대접하는 관행에 따라 시임 관장의 배려로 그리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한 관원의 첩실로 들어갔다 할지라도 그 관원이 이미지를 떠나게 되면 특별히 챙기는 일이 없는 한은 반드시 규범에 얽매여 살지 않은 것이 그때의 풍속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간아지만은 관비출신자로서 어느 사대부가의 규수도 따르지 못할 정숙한 부덕을 지켰다. 그러니까 간아지의 덕행은 유훈도가 나이들어 훈도직을 사임하고 순창 고을을 떠난 날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인데 그때 유도훈의 나이 50세였다고 하더라도 간아지의 나이는 그보다 훨씬 젊었을 것이며 또 관하에서 보고 듣고 자라서 그 용태 또한 신분에는 걸맞지 않게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유훈도가 떠난 후에도 일편단심 그만을 생각하고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러한 그를 내버려 둘 이가 없었다. 부모 와 이웃 사람들은 개가할 것을 종용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출신성분이 그러하였으므로 더욱더 난처하고 곤혹스러운 일들이 많았으련만 다 물리치고 탈없이 담담하게 살아갔다. 이미 여러 해가 흘러 마침내 유훈도가 세상을 뜨게 되자 3년 동안을 얼굴을 다듬지 아니하고 지극정성으로 복을 입었다. 그런 얼마 후에는 그 부모가 거듭 개가할 것을 강요하자 더 참지 못한 간아지는 손수 자기 머리를 자르고 담양 얼그실 유훈도의 본체로 도망가서 한평생 절개를 지키며 살았다는 이야기다. 그후 1512년(중종 7년) 4월달에 중종 임금께서 전국에 교유하시기를 본조의 충신과 효자와 열부들의 사적을 빠짐없이 추심 하여 책자로 만들라 하였다. 그리하여 예조에서 각도에 통문을 내려 절의가 가히 포양할 만한 인물은 성명과 직함을 빠짐없이 보고하라 하였는데 그 당시 전라 관찰사 남온(南溫)이 장계하기를 "고훈도 유문표의 관첩 간아지는 훈도가 체거 후에도 신(信) 을 지키고 또 훈도가 죽은 후에도 3년의 복을 입고 얼굴 꾸밀 것을 일삼치 않았으며 그 부모가 개가할 것을 권하자 머리를 깍고 훈도의 집으로 도주하여 절개를 온전히 하고 과거(寡居) 생활을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1514년(중종 9년)에 조정에서는 간아지의 충정을 기리어 정려비를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정려비는 본시 순창군의 객사 앞 한다리(대교 大橋)가에 세웠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고 빗돌만이 남아 뒹굴던 것을 왜정 때 한다리 보수공사를 하면서 그 주변을 마구 파헤치게 되었다. 그때 연고자인 금과면 남계리의 문화유씨 문중에서 빗돌을 수습하여 그들이 살고 있는 동네 뒤꼍에 있는 제각 뜰방에 옮겨 놓았다. 그런데 그새 섯달 그믐날에 연고자의 한 사람인 유동현이 꿈을 꾸기를 한 소복여인이 현몽하여 하는 말이 "내가 일찍이 나라의 은혜를 입어 왔는데 이제 의지할 곳이 없으니 슬프다"면서 연기처럼 사라져 갔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예사롭지 않은 꿈이 마음에 걸려 전전하고 있는 차에 별안간 불빛이 창문에 환하게 비쳐오므로 놀란 문을 열어보니 바로 얼마 전에 옮겨다 놓은 간아지의 빗돌이 있는 제각에 불이 붙어 무섭게 타 오르고 있었다. 이리하여 별안간에 원인모를 화재로 제각을 소실한 그들은 문중 회의를 소집하고 의논하기를 비록 관비출신의 관첩이라 하더라도 유훈도만을 섬기고 수절 종생하여 나라에서는 이미 절부의 정려가 내린지 오래이므로 간아지는 유훈도 집안의 세신임에는 틀림없다 하여 마침내 간아지의 빗돌을 유훈도의 묘계하에다 세우게 되었는데 지금도 담양군 대덕면 비채리에 있는 유훈도의 묘계하에는 초라하지만 고색이 창연한 간아지의 정려 빗돌이 예대로 서있다. 너무 오랜 세월(480여년) 동안 비바람에 마모되어 잘 알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비의 전면에는 "節婦故訓導柳文杓接官婢 干阿之之閭(절부고훈도유문표접 관비 간아지지려)"라 새겨있고 그 왼쪽 가에는 작은 글씨로 "正德九年六月日(정덕구년구월일)"이라 적혀있다. 그러니까 정덕 9년(正德九年)이면 우리나라 묘호로 중종 9년이 되고 1514년이다. 그때 정려가 내렸으니 지금까지는 484년이다. 그 빗돌 바로 곁에는 간아지의 제단을 모셔 놓았는데 해마다 제사를 받들고 그 열렬한 충정을 기리고 있다. 충운 곧 임금과 주인을 섬기는 것이요 정은 곧 지아비(남편)을 섬기는 것이니 간아지는 이 두가지의 덕목을 겸행한 그 시대 최고의 여인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일은 아름다운 덕행을 실천하여 나라에서는 그 빗돌은 간수 하지 못하고 타관에 가서 연고자의 주선으로 겨우 보존되어 있으니 이래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흔히들 유산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보물이 되고 재산이 될 만한 유산을 물려받거나 챵기는 일에는 성의가 대단 하지만 문화유산을 아끼고 지키는 일에는 너무나 소극적인 것같다. 제아무리 물질의 풍요를 누린다 해도 정신이 황폐하고서는 문화민족이나 문화시민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가 잘 알고 있지만 이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지성은 그리 많지 않으니 진실로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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