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전설(모자리에 관을쓴 옹몽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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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06-01-26 22: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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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록자 : 양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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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계면 도사리 자택 우리 속담에 " 못자리에서 관을 쓴다"라는 말이 있다. 이말은 자기 태생지에서 환골탈퇴하게 성공한 사람을 비유해서 하는 말인데 순창에서 낳아 탁월한 문재와 인품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고을 수령을 거쳐 조정의 청요직을 두루 섭렵하여 가는 곳마다 선정을 하여 나라의 제도를 개혁하는 등 많은 업적을 쌓아 조선조 오백년 동안에 우리 순창에서 유일하게 신분의 벽을 뛰어넘은 사람이 있으니 그가 곧 청하 옹몽진이다. 일찍이 고려조의 사대부가였지만 이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후 불복신으로 영락하여 마침내 순창고을 향리로 강속하게 되었는데 순창에 입향한 것으로 추정된 옹규의 증손자에 해당된다. 그의 자는 응룡이고 호는 청하인데 그가 청하 군수를 지낸 일이 있으므로 그리 부르게 된 것같다. 그리고 관향은 옥천이다. 1518년(중종 13년) 10월 8일 순창군의 호장 옹은운의 아들로 오산 아래(지금의 순창읍 교성리 134-1 순창향교) 작은 오두막집에서 태어났다. 낳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것은 시임군수 이소 공이 동헌 온돌에서 잠시 오수를 즐기던 중 오산아래 수칸 오두막집이 갑자기 오색의 서운에 뒤덮이더니 그 속에서 황용 한마리가 여의주를 희동하며 하늘높이 오른 것을 보고 놀라 깨어났다. 남가일몽이라 급히 통인을 불러 꿈에 본 오두막집을 물어본 즉 옹은운의 집이라 하므로 즉시 은운을 부러 자초지종을 묻자 겸연쩍어하며 조심스럽게 대답하기를 "소인놈이 자식을 보았습니다요"하였다. 군수는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꿈에 용을 보았으니 이름은 몽진이라 하고 그 아이는 훗날 크게 될 것인즉 아무쪼록 어여삐 키우도록 하여라"하면서 미역 다섯 장과 쌀 서말을 하사했다. 그후 탈없이 잘 자란 아이는 그 성장 과정도 남달라 나이 불과 아홉 살때 동네에서 젊으나 젊은 아낙이 죽어 나가는 상여굿을 보러 나갔다가 그 처량한 정경을 보고 만사를 지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는데 그 시에 왈, 어찌그리 바삐 왔다 바삐 가는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것이 오고 가는 곳을 알지 못한 까닭은 그 오고 감이 모두 바쁘기 때문일세 동네 젊은 아낙이 죽어 나가는데 상주도 없는 쓸쓸한 상여를 보고 아홉 살난 몽진의 눈에는 과연 무엇이 비쳤기에 이와 같은 시를 지었는지 모른다. 구구절절이 소년답지 않은 깊이와 뜻이 함축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케 한다. 또 열두 살이 되던 해는 군수가 고을 안에 젊은 청년 무사들을 초청하여 광덕산을 구경갔는데 그 행차에 수행한 몽진은 군수의 명을 받고 유광덕산기라는 기행문을 지어 또한번 놀라게 하였는데 열 여섯 살이 되자 조리정연하고 호소력있는 문장으로 탈향리 방립문을 지어 성주에세 전달하여 관부를 놀라게 하였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옛날 지방 관아에는 많은 향리들이 있었는데 그 의관이 특이하여 방립이라고도 하고 칠갓이라고도 한것을 썼는데 갓테가 너무 커서 얼굴을 뒤덮을 뿐 아니라 무거워서 항상 머리를 숙이고 다녀야 할 정도였으므로 매우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웠지만 제도가 그러하고 오랜 관습이라 누구도 감히 불평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이어린 몽진이 이 사실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 후 경학 문장이 일취월장하여 명종 1년(1545년)에 28세로 사마시에 급제하고 명종 8년(1552)에는 35세로 중시에 급제한 후 음성,청하,영산,영덕 등지의 군수와 판관을 역임하고 충청도사,형조좌랑을 거쳐 병조정랑에 이르고 수직으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의가자가 내렸다. 특히 청하군수 때는 선정을 하였으므로 그 고을 사람들이 비를 세우고 청백갈문을 새겼는데 그 비문에 이르기를, 그대와 함께온 청풍은 그대 떠난후에도 아름다우이 그대가 있고 없고 청풍은 은은하니 오래도록 이고을의 청풍이로세 꽃다운 그이름 잊지 못함이여 더욱 새롭게 사무치네 얼마나 청백리였으면 이와같은 말로 칭송하였겠는가. 그리고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은 앞서 말한대로 열여섯 살 때에탈향리 방립문을 써서 세상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는데 몽진이 중시에 급제하고 나서 명종대왕을 독대하는 은전을 입었을 때 그 자리에서 그 문제를 간곡히 주청하여 비로소 왕명으로 전국 각도 관아에 있는 모든 향리들의 방립을 벗기고 평갓을 쓰도록 만들었으니 이는 곧 천년 묵은 제도와 풍속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때 시대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 돼서 조정에서나 향촌에서나 큰 충격을 받았으며 덕분에 향리들은 그 무겁고 몰상사나운 질갓을 벗게 된 것이다. 이와같이 다재다능하여 나라에는 공을 세우고 집안에는 영광을 가져온 옹몽진은 선조 18년(1584년) 섣달 어느 날에 천수 66세를 누리고 타계하였는데 생전의 행적을 기리는 유애비가 음성읍에 있고 유허비는 청하읍에 있으며 그 업적을 도의 한국지, 전북도지, 호남지, 음성군지, 순창군지 등에 재록하였다. 그리고 그의 문집이 따로 있으며 앞서 말한 유광덕산기와 탈향리 방립문은 순창군지 고전편에 수록하고 있다. 아! 일개 산중 고을 관아에 속한 향리 출신자로서 조정에서는 청백리로 대접받고 향리에서는 글 잘하는명사로 존경받다가 죽어서는 금석에 그 이름을 전하니 이보다 더 무엇을 바랄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