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전설(삼인대의 전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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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06-01-26 22: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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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록자 : 양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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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소 팔덕면 광덕산의 강천사 건너편에 충암절벽 봉우리 위에 맷방석만한 반석이 있는데 사람들이 이 바위에 다가 삼인대라 새긴것은 감격스러운 충의담 한 토막이 전해오기 때문이다. 연산군(燕山君)의 학정이 극에 이르자 1506년(연산군 12년) 드디어 박원종(朴元宗, 1467∼ 1510), 성희안(成希顔, 1461∼1513) 등이 주동이 되어 연산군(燕山君)을 몰아내고 성종의 둘 째 아들이며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瞋城大君)을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했다. 이것이 이른바 중종반정(中宗反政)이다. 신씨(愼氏)는 연산조때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신수근(愼守勤)의 딸이었다. 중종반정(中宗反政)을 주동하고 성공한 박원종(朴元宗)등 반정공신(反政功臣)들은, 신수근(愼 守勤) 일파가 반정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숙청하고 이어 신수근의 딸을 왕비(王妃)로 두었다가는 뒷날 후환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중종(中宗)에게 폐비(廢妃)를 강요하였다. 이에 중종 은 처음에는 반대하였으나 결국 공신들의 강압에 못이겨 신씨(愼氏)를 폐출(廢黜)하고 윤여필(尹汝弼)의 딸인 숙의(淑儀) 윤씨(尹氏)를 새 왕비(章敬王后)로 맞아들였다.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는 왕자를 낳고 살다가 결혼한지 10년만인 중종 10년(1515) 에 사망하였다.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사망하자, 이때 순창군수(淳昌郡守)인 충암(庶庵) 김정(金淨, 1486∼ 1521), 담양부사(潭陽府使)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1∼1530), 무안현감(務安縣監) 석헌(石 軒) 유옥(柳沃, 1485∼1519)등 세사람이 비밀리에 이곳 강천산 계곡에 모여서 과거 억울하게 폐위된 신비(愼妃)를 복위시킴이 옳다고 믿어, 각기의 관인(官印)을 나뭇가지에 걸어 맹세하고 상소(上疏)를 올리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이들이 소나무 가지에 관인을 걸어놓고 맹세한 곳이 여기라 하여 이곳을「삼인대(三印 臺)」라 부르게 된 것이다. 세 사람은 관직으로부터의 추방은 물론 죽음을 각오하고 상소문(上疏文)을 올렸는데, 당시 무안현감인 유옥(柳沃)에게는 노모(老母)가 계시는데 형제가 없었다. 그래서 순창군수인 김정(金淨)과 담양부사인 박상(朴祥)은 "우리는 형제가 있으므로 죽게 되어도 다른 형제가 부 모를 모실수 있지만 그대가 만약 불행한 일을 당한다면 노모를 봉양할 사람이 없으니 그대의 이름을 빼는 것이 옳다"고 하여 상소문(上疏文)에는 유옥(柳沃)의 이름을 적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신씨(愼氏) 복위상소(復位上疏)가 올라가니 조정에는 반정공신(反政功臣)들이 적극 나서서 이들을 잡아다가 처형하려고 하였다. 이에 정광필(鄭光弼)이 극적으로 말려서 목숨은 건질 수 있었으나, 김정(金淨)은 함림역(含琳 )으로 박상(朴祥)은 오림역으로 유배 되었다. 김정(金淨)은 그로부터 4년후인 1519년의 기묘사화(己卯士禍, 中宗 14)에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521년에 사사(賜死)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36세였다. 그리고 유옥(柳沃)은 복위상소(復位上疏)로 인한 화는 면했지만 얼마 후에 병으로 죽었다. 그후 1775년 (영조 51년)에 조정에서는 신비(愼妃)를 복위하였고, 단경왕후(端敬王后)라 추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