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지명전설(답포고개의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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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06-01-26 23: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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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록자 : 양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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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답포고개는 순창읍 남산대에서 신담리까지의 약 십리 가량되는 완만한 고갯길을 말함인데 지금은 88고속도로 인터체인지가 자리잡고 있다. 답포고개, 즉 베를 밟고 가는 고갯길이란 이름이 붙은 유래를 알아본다.
옛날 연산군 때 있었던 일이다. 남산대 사는 신귀래정의 장손인 신공체라는 분이 있었는데 청렴결백하여 청백리로도 유명한 분이다. 그런데 그분이 대소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으로 있다가 1499년(연산 5년)에 능주현령으로 부임하여 백성위주의 선정을 베풀어 세금을 감면해주고 부역을 줄여주는 등 위민 애육의 선정을 실천하여 고을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러니까 흉년이 들고 가뭄으로 농사를 버리게 되면 백성과 더불어 똑같이 죽물을 넘기고 살았으며 괴질이라도 번지는 날엔 관원을 동원하여 일일이 보살펴 주었다. 그러나 평소에 아무리 어려워도 공물에 손대지 않았으며 받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고을 백성들은 신공제를 부모와 같이 따랐고 신공제 역시 고을 백성들을 친 동기와 같이 배려하며 살았다.
그런데 1503년에 조부인 신귀래정이 졸하여 파관하고 향리인 순창 남산대로 돌아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능주고을 백성 들은 집집마다 포목을 갖고 나와 귀향하는 현령에게 바치고자 하였으나 신공제는 일절 받지 아니하고 민폐를 엄금했다. 백성 들은 자기들의 성의가 거절 당하자 신공제의 행렬에 너도나도 배를 짊어지고 따라나서 순창 남산대까지 이르렀다. 여기서도 신공제는 끝까지 사절하매 할 수 없이 신귀래정의 상여가 지나가는 남산대에서 신담리까지 십 리 가량의 고갯길에 포목을 깔고 상여가 지나가도록 무릎을 꿇고 경배하기로 하였다. 때마침 연산폭정이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사회기강이 해이해진 때였지만 그 길에 깔린 포목은 도적도 걷어가지 않아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청백리 신공제의 선정을 알아주는 증표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고개를 답포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순조 때 전라감사로 부임한 이서구는 신공제의 청백리 갈문에서 "전라 56고을이 모두 답포고개여"라고 칭송한 적이 있다.